창작자의 혼, 그리고 AI

2025. 6. 22. 18:25개인적인 생각

 

매주 연재하는 '창작자를 위한 AI'를 쓰다가 갑자기 생각나서 몇 자 끄적여본다.

 

나는 디자인과를 나왔고, 인디게임을 개발했다. 인디게임 개발자들이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서도, 그리고 모든 창작자들이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서도. 나는 창작자들이 나름대로의 '혼'을 갖고 작업에 임한다고 믿는다.

 

내가 6살때 워크래프트 2로 접했던 블리자드는 창작자의 혼이 있는 회사였다. 자신들이 재미있다고 느끼는 게임을 위해서 온 몸을 갈아가며 개발했던 그들의 열정과 노력은 게임에 그대로 묻어나왔다. 누가봐도 '이거 진심으로 만들었구나...'라는 탄성이 나올 정도였다.

내 방에는 아직도 호드 깃발이 걸려있다.

 

반대로 영혼 없는 양산형 Pay to Win 게임들은 그래서 몸서리쳐지도록 싫었다. 특히 리니지의 성공 이후, 저급한 슬롯머신형 게임들이 넘쳐날 때는 정말 끔찍했다.

누군가는 나를 힙스터라 부를지 모르지만, 어떤 게이머가 돈에 눈이 멀어 유저의 가슴을 뛰게 하는 법도 모르는 게임을 원하겠는가.

게이머라면 누구나 스토리가 있고 디테일이 살아있는, 창작자의 '사랑'이 듬뿍 담긴 게임을 원한다. 아무리 생존이 절박해도, 게임을 그저 돈만 뽑아내는 슬롯머신으로 만드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지 모르겠다.

 

적어도 나는 정말 좋아서, 사랑해서 창작을 했다.

첫 게임을 완성할 때까지 1년 반 동안 아무런 수익이 없기도 했고, 출시 후에는 새벽 4시 퇴근과 30일 연속 야근이 잦았다. 그럼에도 창작열이 빛을 발해 첫 게임은 100만 장, 두 번째 게임도 제법 팔렸다.

 


 

이토록 '혼'을 중요시하는 사람이기에, 처음에는 내 주변 창작자들에게 AI 사용을 이야기하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요즘 AI를 둘러싼 이미지가 '윤리적으로' 좋지 않은 탓이었다. 마치 양산형 P2W 게임을 만들던 싸구려 마인드처럼, AI를 남의 아이디어를 강탈해 돈 버는 수단으로만 쓰는 이들이 넘쳐났다.

게다가 '자동화'와 '찍어내기'를 앞세워 "개발자 다 죽었다", "그림쟁이 필요 없다"고 외치는 이들을 볼 때면, 내 의도마저 오해받을까 두려웠고, 한편으로는 가슴이 아려왔다.

 

하지만 내가 AI를 활용하는 방식은 그들과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나는 AI를 나의 창작을 위한 조수로 사용한다. 불필요한 노가다를 줄여 핵심에 집중하고, 막연한 구상을 단단한 기획으로 다듬으며, 실수를 분석해 더 나은 결과물을 만드는 과정에서 도움을 받을 뿐이다.

 

AI 자동화로 월 1000... 이게 정녕 AI를 갖고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인 걸까?

 

 

이런 긍정적인 가능성이 분명히 존재하는데도, 현실은 안타깝기만 하다. 자신의 생각을 구현하는 데 AI의 도움을 받기보다, '자동화'라는 미명 아래 자기 생각마저 AI에 외주를 맡겨버리는 영혼 없는 사람들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기존 창작자들은 AI를 제대로 알아보기도 전에 등을 돌리게 되었다. 영혼 없는 이들이 "창작은 '딸깍'이면 끝나는 일"이라며 그 가치를 폄하하고, 창작자들을 구시대의 유물처럼 조롱하는 광경에 마음이 먼저 지쳐버렸기 때문이다.

 

어째서 AI를 자신의 역량을 한 단계 끌어올릴 강력한 도구로 보지 않는 걸까? 어째서 불필요한 시간을 줄여 창작의 본질에 더 다가갈 생각은 못 하는 걸까?

이런 질문을 던질수록 씁쓸함만 커진다. 한쪽에서는 'AI 공장장'들이 남의 것을 훔쳐다 양산형 블로그 글과 쇼츠를 찍어내며 시장을 흐리고, 다른 한쪽에서는 이에 환멸을 느낀 창작자들이 AI를 적으로 규정하고 모든 가능성에 문을 닫아버린다. 정작 AI를 '혼'을 담는 창작의 조수로 삼으려는 진지한 시도는, 이 양극단의 소음에 묻혀버리는 것만 같다.


다행히 이 무의미한 대립에 모두가 휩쓸리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AI에 대해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냈을 때, 아까 말한 창작자 지인들은 걱정과는 다른 반응을 보여주었다. 웹툰작가와 아트토이 작가인 그들은 본인들만의 컨텐츠가 있는 사람들이고, 본인만의 스토리가 있는 사람들이다.

그렇기에 창작에 혼을 실을 줄 모르는 멍청이들이 AI로 영혼없는 복제품을 아무리 찍어내도 필요이상으로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본인들의 복잡하고 지난한 작업을 도와줄 조수로서 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 하며 관심을 갖는 모습이었다.

 

나는 두 게임에 등장하는 모든 거의 로고와 아이콘, UI/UX를 작업했었다. 심지어 굿즈와 홍보자료까지도... 만약 그 때 AI가 있었다면?

 

 

게임개발자 시절 나는 컨텐츠를 펼치는데 방해가 될 정도로 무의미한 노동량에 시달렸었다.

우리 팀은 2번째 게임을 개발하는 순간까지도 어떠한 에셋도 구매하지 않았다. 일러스트를 제외한 모든 그래픽 에셋을 내가 다 디자인했기 때문이다. 그 때의 고생을 생각하면, 그런 단순 노가다 작업은 철저한 기획과 디자인 시스템을 통해서 단축할 수 있었다면 더 좋았을거라 생각한다.

훨씬더 창의적이고 다양한 시도들을 해볼 수 있었겠지.

 

당시의 노가다 작업으로 인해 나는 굉장히 많은 것을 배웠고, 그 시간들이 아깝다거나 하지는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했던 작업들 중에 상당수는 솔직히 불필요한 노가다가 많이 섞여있었다. 정말 하찮을정도로 작은 것을 수정하는데도 노동이 들어갔고, 그것이 게임 전체 흐름에, 시나리오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가 아니었던 적이 많다. 그저 시각적 결함을 메우기 위해, 완성도를 위해 해야했던 추가작업들은 지금의 AI기술이 있었다면 훨씬 간단하게 해치울 수 있었을 거고, 더 좋은 시안을 만들 시간도 남았을 것이다.